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알베르 카뮈 (문단 편집) == 사상 == 카뮈의 사상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게 평가받는 것은 [[시지프 신화]]이다. 그가 동시대에 활동하며 자주 충돌했던 [[장폴 사르트르]]와 도대체 어떻게 다른지는 그의 문학 작품만 비교해서는 좀처럼 알기가 어렵다. 사르트르의 [[구토]] 같은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이나 카뮈의 [[이방인]]이나 비슷해보일 뿐이다. 그런데 이 모호함을 단번에 깨버리는 것이 시지프 신화이다. 이 책은 시기적으로도 [[이방인]]과 거의 시간간격이 없게 출판 되었고 내용적으로도 어느정도 해설서 역할을 수행한다. 때문에 두권을 번갈아가면서 읽을 수만 있다면 그의 사상과 작품 세계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돨 것이다. 다만 '시지프 신화'가 서양 철학 개념을 안다고 전제하고 쓰여졌기 때문에 해설서 없이 이해하는 것은 끔찍하게 어렵게 느껴질 수 있다. 그의 사상을 정리하자면, [[프리드리히 니체|니체]] 사상에서 인생론 부분을 구체화 시킨 것이다. 카뮈는 [[부조리]]를 기존에 내가 가지고 있던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이 무너진 것에서 오는 상태로 정의한다. 가령 세상에 산타클로스가 없다는 것을 깨닫는 어린아이의 고통도 일종의 부조리다. 물론 카뮈 시대 사람들에게 더 일반적인 것은 산타클로스 정도가 아니라 [[모더니즘]]에 대한 믿음이 양차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사라진 것에서 오는 부조리였다. 간단히 말해 과학과 이성을 백날해봐야 우리가 올바르게 사는 것은 커녕, 모두 전쟁의 잿더미만 남겼다는 분노와 상실감속에 유럽은 있었다. 카뮈가 보기엔 이 또한 부조리의 일종이었다. 다만 해결 방법에 있어서 카뮈는 니체와 다소 다른 방법을 제시한다. 니체의 경우에는 [[초인]]으로 불리는 것인데, 내가 느끼는 것들은 동물적인 것의 변형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가령 내가 느끼는 사랑과 그 감정에 대한 추구는, 인간이란 동물이 진화해오는 과정에서, 그것이 집단생활을 통한 생존에 유리하게 작용했기에 도태되지 않고 유전되어온 형질일 뿐이다. 다시 말해 어떤 목적이나 의도 없이 돌연변이와 자연선택의 결과로 발생한 동물적 생존본능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나 니체는 선배인 [[아르투어 쇼펜하우어]]와 달리 그렇다고 그게 무의미하다고 보지 않는다. 니체는 인간의 가장 멋진 점을 허영심 섞인 상상력이라고 여긴다. 비록 시작점은 생존본능이지만 인간은 결국 자신의 생존을 뛰어넘는 것을 추구하는 존재, 즉 '초인'이 되고자 한다는 것이다. 가령 자신의 몸을 바쳐 사랑하는 사람들, 인류 등을 지키는 고귀한 행위로 나아가는 것이 그러하다. 니체는 이렇듯 허영심과 상상력을 중요하게 여긴다. 그런데 카뮈는 그러한 초인이나 상상력 추구 등을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카뮈와 니체가 전혀 다른 종류의 사람을 대상으로 책을 썼기 때문이다. 니체의 경우에는 지적이면서 창의적인 것을 추구하는 사람들 가령 혁명적인 지식인이나 예술가 등을 염두에 두고 사상을 전개했다. 반면에 카뮈는 그가 고려하는 사람이 노동자라는 것을 명확히 밝힌다. 지식이나 사상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수동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위치에 놓인 노동자로서는 니체와 같이 스스로 상상력과 지적인 발랄함을 발휘하라는 조언은 사실상 불가능하게 들릴 수밖에 없다. 카뮈는 이러한 일반 노동자 계급의 시점에서 어떻게 부조리를 타파할지를 고민한 것이다. 카뮈는 '부조리'에서 내가 느끼는 고통도 결국 내가 살고자 하는 강한 마음에서 나온 것이라고 한다. 나의 삶의 욕망이 의미를 만들려고 하고, 또 원하지만 무의미한 세상에 의해서 좌절되는 것을 부조리라고 본다. 다시말해 잘 살고 싶은데 잘 안될 때 느끼는 빡침의 일종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부조리를 견디다 못해서 자살로 나아가는 것은 너무 황당한 일이다. 카뮈는 '철학적 자살' 즉 세상에 대한 나의 신념이 깨졌다고 죽는 것을 가장 어리석은 일로 여긴다. 왜냐면 니체적인 관점에서 보면, 신념이라는 것은 결국 내가 잘 살고, 행복하게 살려다 보니까 생긴 것인데 이를 위해서 죽는 것은 목적과 수단이 뒤집힌 것이기 때문이다. 이 부조리에 관해서 카뮈는 동시대의 [[실존주의]]자들에게 매우 비판적이다. 당시 프랑스의 실존주의자들은 저 유명한 [[장폴 사르트르]]를 포함하여 대부분 [[에드문트 후설]]의 현상주의에 기반하고 있었다. 그런데 카뮈는 이들 후설 계열은 세상에 어떤 의미도 없다는 것을 또다시 하나의 절대적인 진리로 받아들이는 태도, 다시 말해서 종교화 시키려 든다고 비판한다. 그가 특히 문제의식을 가지는 것은 그들의 이성에 대한 태도이다. 실존주의자들 중에는 이성이 완전한 설명을 제공하지 못하기 때문에 무의미하다고 말하는 주장도 심심찮게 나오는 중이었다. 이에 대해서 카뮈는 니체적인 의견을 제시한다. 그는 니체와 마찬가지로 이성이 완전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무의미하지도 않다고 주장한다. 어찌되었든 한개의 관점으로서 각각의 이성은 훌륭한 역할을 수행한다는 것, 다시말해 '상대적 이성'으로서 작동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대적 진리가 아니므로 폐기하라는 것은 카뮈가 보기에는 허무주의로 직행열차를 타는 것이나 다름없다. 카뮈가 보기에 실존주의자들이 이렇게 무진리를 교리화 시키는 태도가 나오는 이유는 그들이 여전히 절대적인 진리를 찾고 싶다는 욕망에 휘둘리고 있기 때문이다. '초월'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카뮈는 '초월'을 추구하는 것에 비판적이다. 이 또한 니체적인 의견인데, 그러한 추상적인 것을 추구하면서 결국 내 삶의 경험을 한계 짓는 다는 것이다. 가령 엄격한 교리에 따라서 수행하는 수도사는 이성과의 경험을 할 수가 없을 것이다. 초월과 영원성과 같이 추상적인 개념의 반대편에는 감각적인 생생한 경험이 있다. 카뮈는 유명한 호색한 [[돈 후안]]과 연극배우라는 직업을 예시로 든다. 돈 후안은 눈 앞의 여성만을 열렬히 반복해서 사랑한다는 것이다. 그에게 영원한 사랑이란 것은 없다. 그저 매 순간만이 있을 뿐이다. 배우 또한 마찬가지인데, 작가와는 달리 연극배우는 자신의 활동을 후세에 남길 수가 없다. 연극을 녹화 기록하는 것은 거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결국 배우의 연기는 오로지 매 무대에 오르는 순간에만 존재한다. 바로 피자마자 덧없이 지는 꽃 같은 것이다. 그럼에도 배우는 돈 후안과 마찬가지로 매 순간에 자신의 최대를 담아 '소진'시키며 연기한다. 매 순간을 '소진'시키는 것은 카뮈에게 중요하다. 모든 진리는 무의미하다. 그렇다면 결국 남는 것은 감각적 경험 뿐이다. 카뮈가 보기에는 절대적인 진리가 없기 때문에 그 어떤 경험도 우열이 있을 수는 없다. 가령 화가의 가난한 생활은 은행가가 보기에는 무가치한 경험이지만, 비평가가 보기에는 가장 풍부한 영감의 경험일 수도 있다. 은행가도 비평가도 상대적 진리를 말하기 때문에 경험을 딱히 딱 얼마짜리 경험이다 하고 가치를 매길 수가 없어지는 것이다. 여기서 카뮈는 재밌는 생각을 하는데, 경험의 질의 차이가 무의미하니까 경험의 '양'이 많은게 좋은 것이란 거다. 그래서 거의 똑같은 수작을 여성에게 피우는 돈 후안이나 거의 같은 연기를 반복하는 배우의 삶이야 말로 지극히 모범적인 삶이 되는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